일본에서의 몽골시대사 연구

스기야마 마사아끼(杉山正明)
梁寧佑.任大熙 옮김

머리말

13·14세기에 인류역사상 최대판도를 실현한 몽골과 그 시대에 관한 연구는 몽골지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18∼19세기에 유럽과 러시아에서 ‘東洋學’이 생겨나자 그 주요한 한 분야가 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에 이르는 역사를 쌓아왔다. 그 동안 러시아의 발트리드(B. B. ), 프랑스의 뻴리오(P. Pelliot)를 비롯해 많은 뛰어난 연구자가 배출되고, 아시아역사상의 偉觀을 이루었다.

典據로 하는 文獻은 漢語·페르시아어의 2대 사료군 이외에 몽고어·투르크어·위구르어·티베트어·아라비아어·시리아어·아르메니아어·그루지아어·라틴어·그리스어·고대 러시아어·중세 프랑스어·이탈리아어·한국어·일본어 등 20여 개 국어에 이른다. 또 대상으로 하는 지역도 동쪽으로는 동해로부터 서쪽으로는 러시아·아나톨리아·동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몽골의 領域은 물론, 직접지배를 받지 않은 서유럽·이집트·인도·동남아시아 다도해 지역·일본 등 政治·經濟·文物·技術·學術·思想·宗敎 등의 여러 가지 면에서 접촉·교류가 있고, 대부분의 ‘舊世界’ 전역에 이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니다.

관계되는 문제는 실로 複雜多岐하여 한이 없다. 한정된 하나의 국면을 고찰하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더라도 다른 여러 가지의 국면에 관해 배려하고, 비교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또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인 면과 특수한 면을 잘못 보아 종종 독단에 빠지기 쉽다. 하찮은 일이라도 그 윤곽을 적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 개인의 능력·노력을 가지고 하여, 多言語의 문헌을 읽고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기존의 연구도 어지간히 대강 훑어보고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는 것 마저 실은 의심스럽다. 때로 다른 종류의 언어문헌의 사이에 연결의 실마리를 찾아내어서 도약하는 것도 있다. 다종다양하여서 파악이 어려움은 있지만 역으로 문헌연구의 재미, 제호(醍 )맛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방대·다양한 문헌과 문제의 산을 앞에 두고, 과연 어디에서부터 손을 데야 좋을까 도대체 무엇이 자신에게 가능한 것인가? 망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거짓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역사분야보다도 하물며 몽골시대사가 넘치는 매력을 가진 것은 유라시아의 역사를 부분사의 총화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점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는 몽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개개 뿔뿔이 전개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던 複數의 역사세계는 일거에 ‘세계사’로 묶여졌다. 몽골의 지배는 지역에 따라 長短이 있고, 전체적으로 몽골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두세기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同時性이라고 하는 가로실[橫絲]에 연결되어, 이 시대 유라시아의 각지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相互連動하고 또 공통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확인된다. 封土制나 莊園制, 혹은 전근대에 있어서 國家나 民族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등, 지금 조금은 낡고 녹슨 것 같이 보이는 역사학의 고전적 테마가 이 시대에 관해서는 실현으로 유효한 것으로 되살아난다. 이른바 大航海時代이전 세계각지는 몇 개의 문명권으로 나뉘어져 서로간에 다소간의 교섭은 있었어도, 각각은 별개의 ‘폐쇄된 세계’의 속에서 살아가고, 15∼16세기가 되어서 비로소 유럽인의 손에 의해 세계사에로의 걸음을 시작했다고 보통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 몽골시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낸다면, 이러한 통념은 아무리 생각해도 歐美人의 입장이었지, 역사상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일까 크게 의심된다. 陸海를 포함한 유라시아史의 전체상을 구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몽골시대사의 연구는 그것을 위한 절호의 시야를 제공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많은 선학들이 몽골시대사의 망막(茫邈)하여 취하기 힘든 황야에서 개척의 가래질을 하여, 생애를 그 연구에 투입한 것도, 필시 몽골시대사연구 그것이 본래 가진 파도 다하지 않고 한없음과 재미에 탐구심을 돋구어져, 혹은 인류사의 맥락을 묻는 더없는 매력에 빠졌던 것이리라. 우리들 후학들도 역시 선학들의 硏鑽의 족적을 연모하여, 원전연구의 대해에 몸을 담그고, 싫어하지도 않고 소걸음처럼 우직하게 걸음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本稿에서는 일본에서의 몽골시대사연구의 진전에 관해서 필자 나름대로의 槪述을 시도하려 한다. 이미 일본의 연구정황에 관해서는 {世界歷史大事典}23권 [史料編][東洋](平凡社, 1955) 또는 {東洋史料集成}(1956)의 [몽골時代], [元代], [東西투르키스탄]의 各項, 사구찌 토오루(佐口透) {몽골帝國과 西洋}[東西文明의 交流]4(1970)권말의 文獻解題, 야마네 유키오(山根幸夫)·오오지마 다쯔꼬(大島立子) 編 {原代史硏究文獻目錄}(1971), 日本몽골學會 編 {몽골硏究文獻目錄 1900∼1972}(1973), 야마네 유키오(山根幸夫) 編 {中國史硏究入門}上(1983)의 [宋元時代], {아시아歷史硏究入聞}1∼5, (1983∼1984)의 [遼金元][몽골][투르키스탄][이란][東西交通] 등에서 상세하고, 여기에서 다시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하, 일본의 연구의 주요한 동향을 특히 세계의 몽골시대사연구상에 있어서 그 貢獻과 特性에 유의하면서 대충 서술하고, 더불어 근년, 급속하게 새롭게 전개를 보이고 있는 현황을 금후의 과제로 포함해서 전망하려한다.
더욱이 表題를 ‘元朝史硏究’라고 하지 않고 ‘몽골시대사연구’라고 한 것은 {中國史學}이라고 이름지은 本誌에는 얼핏보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이 시대에 관해서는 원래 다루는 事象 그것이 설령 중국방면의 것의 경우에도 중국사의 테두리만으로는 충분히 처리되지 않는 국면이 많은 위에다가, 일본의 연구도 또 중국의 지평을 넘는 것도 적지 않게 있고, ‘몽골시대사연구’의 편이 연구정황전체를 보다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硏究의 立場과 特徵

종래의 세계각국의 연구의 대세를 典據史料의 면에서 개관하면 歐美·러시아(소련)·이란·투르크 등의 연구자는 페르시아어 사료를 중심으로 아라비아어·라틴어 등의 서방사료를 주된 근거로 삼은 것이 많고,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연구자는 대체로 漢文史料를 주로 활용해 왔다. 蒙漢合壁의 문헌인 {元朝秘史}는 정확인 이 양자의 접점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동서사료를 동시에 다루는 연구자는 뻴리오를 비롯해 꽤 있었고, 특히 근년은 미국과 일본에 있어서 그러한 연구자가 계속 출현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고 주요한 전거사료가 동서의 연구자의 사이에서 대충 양분되어 온 경향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연구의 방법·관심·성과상에서도 꽤 확실히 성격이나 견해의 차이가 확인된다.
개설하면, 서방문헌에 근거한 서방의 연구자는 그 시대를 유라시아사의 입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이 많고, 역으로 동방문헌 특히 한문사료를 주무기로 한 동방의 연구자는 주로 중국사의 입장에서 원이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를 究明하려고 해왔다. 이것을 일종의 국제분업이라고 본다면 세계의 몽골시대사연구는 동서 兩群의 연구자가 각각 자신있는 언어문헌에 근거하여 나누어 깃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쌍방의 입장과 견해에는 실은 그렇게 간단하게 接合·合體하는 것은 가능치 않은 간격이 있다.
그런데, 일본의 몽골시대사연구는 지금까지 소수의 연구자를 제외하고 한문사료를 主要典據로써 그것을 가로세로로 驅使하여 顯著한 업적을 올려왔다. 수많은 연구자를 배출한 점, 그 성과도 廣範한 점에서 세계굴지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꽤 장기간에 걸쳐서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대상에서 연구의 관심과 정력이 집중 투입되어 온 것도, 세계의 몽골시대사연구 가운데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중국사의 입장에서의 元朝史, 그것도 점차 중국의 周邊史로서의 북아시아사도 포함하는 형태로 그것을 다루는 연구가 다수를 점하지만 그때 북아시아에서 출자한 遼金元의 세 왕조를 일관한 것이라고 취급하여 元朝를 그 완성이라고 보는 입장과, 中華王朝의 교체라고 보아, 宋元 내지는 때로는 元明의 테두리로 時代相을 생각하는 입장의 두가지의 계열이 있었다. 대부분의 연구는 전자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고, 그것도 또 일본의 硏究情況의 특징의 하나로 들 수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독일인 학자 비트포겔(K. A. Wittfogel)이 제창한 [정복왕조(Dynasties of Conquest)]의 생각이 찬반양론을 넘어서 유행했다. 중국의 역대왕조를 漢族王朝와 非漢族王朝로 나누어 다루는 것은 일본의 [東洋史學]전반에서 보이는 경향이고 거기에 일본 특유의 어떤 종류의 民族主義史觀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에서 서술한 두 개의 입장의 어느 쪽을 취할 것인가. 中華文明의 優越의 생각이, 의식하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前提에 있는 것이 많다. 역으로 지배자인 몽골에 관해서는 대부분 暴力·破壞·强權·壓制·野蠻·非文明이라는 나쁜 인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무의식중에 “惡役”의 선입관이 있고, 그것이 歷史事象의 解釋·說明에도 손쉬운 便法으로 종종 사용된다. 이점, 예를 들면 이란 내지는 이스람문화의 低落을 말할 때 몽골의 타격을 그 原因으로 하는 처사에서 일맥 통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통념이나 인상의 힘은 쉽게 지워지기 힘들고, 연구의 방향·관심·결론까지 결정해 버리는 것만으로 성가심이다.
일본의 연구에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 많은 細緻한 文獻考證을 특기로 하는 점이다. 개개 특정의 문제에 관한 複數의 연구자의 입증이나 그것이 불러 온 分析·論旨의 치밀함은 일본의 역사연구전체에 공통하는 특성이지만 몽골시대사연구에 관해서도 뻴리오流의 세잔한 博引旁證이 이상으로 되어왔다. 專門·主題의 세분화·다면화는 해를 따라서 현저하게 되는 경향에 있지만, 歐美의 연구에서는 현저하게 보이는 대담한 체계화로의 시도나 개별의 연구자에 의한 몽골시대通史의 기획은 오히려 적다.
바꾸어서 오랫동안 일본의 연구의 약점이었던 것은, 페르시아어·아라비아어의 이슬람문헌을 근본으로는 다루기 어려움 점이었다. 특히 페르시아어는 각지의 몽골궁전에서 통용어가 되어, 몽골인 자신은 스스로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데, 이란의 프레그울루스(H leg ulus)에서는 이란계의 官僚·宮廷史家가 그들을 대신해 그 역사를 페르시아어로 정리했다. 라시드 압딘(Ra d al-D n)의 {集史( mi’al-Tav r )}를 비롯한 페르시아어 史書가 그것이고 몽골에서 직접 관련된 일들에 관해서 알려고 한다면 꼭 이들의 史書를 번역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 일본의 연구자는 대체로 서구·러시아(소련)의 譯註書에 依據하거나, 혹은 도손(C. D’Ohsson)의 {몽골인의 역사(Histoire des Mongols)} 등에서 인용한 기사를 따르는 간접적으로 인용해 왔다. 그 결과 어떻게 하더라도 몽골 그 자체에 관한 이해는 허술한 점이 있거나, 한문사료가 미치지 않는 중앙아시아 이서의 事象에 관해서는 疏遠한 경향이 있었다. 또 원래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몽골시대사라고 구성을 취하는 것은 어려웠다. 제2차대전전후 혼다 미노부(本田實信)에 의해 페르시아어 사서연구가 도입되어, 근년은 이 약점이 점차 극복되고 있다. 단지 한문사료와 페르시아어 사료라고 하는 2대 사료군의 쌍방에 통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 이외의 諸語文獻에까지 익혀 익숙하게 되다면 일본에서는 지금 조직된 修得·硏鑽한 장없이, 여전히 개인단위의 정말로 보통이 아닌 노력으로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硏究史의 回顧

1) 戰前까지의 主要한 동향
일본은 장기간에 걸쳐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고, 유학이 幕府·諸藩의 敎學의 중심이 되었던 에도(江戶)시대에는 漢文典籍을 통해서 중국전반을 연구하는 학문, 이른바 漢學이 발달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거쳐, 1880년대가 되면 西歐文明攝取의 파도속에서 유럽류의 近代歷史學이 일본에도 도입되어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는 서양사에 대한 것으로서 ‘東洋史’라고 하는 領域이 提唱되었다. 서구인의 역사연구가 典據文獻의 철저한 精査·解讀에 사실은 입각해 있는 것이 알게되자 일본의 신생 ‘東洋史學’이 그때까지 축적되어 있던 한학의 특기를 살려 漢文典籍을 이용한 文獻史學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 서구인의 아시아사 연구에 대항하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硏究對象이 된 지역은 당연히 중국을 중심하고 있었다.
그러한 특수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한 일본의 ‘東洋史學’의 가운데에도 특히 몽골시대사연구는 특별한 의미에서 중시된 분야가 되었다. 일본의 大陸政策이 전개되고 있던 가운데, 그것과 밀착하는 모습으로 ‘滿蒙’, ‘滿鮮’의 연구·조사가 광범하게 진행되고, 일본의 ‘東洋史家’들은 직접·간접으로 ‘滿蒙史’, ‘滿鮮史’에 관한 인간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상태가 반세기 가까운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종료까지의 연구사를 회고할 때 이러한 時代世潮가 연구의 동향에 준 큰 힘을 銘記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 주요한 연구자에 초첨을 맞추어 소개한다.
일본의 몽골시대사연구는 나까 미찌오(那珂通世, 1851∼1908)에 의한 {元朝秘史}의 譯註 {成吉思汗實錄}(1909)의 출현에서 시작한다. ‘東洋史’라는 領域·用語의 제창자이기도 한 나까는 중국의 통사를 집필하여 元朝時代에 이르러 전혀 다른 종류의 역사전개인 것과 몽골에 관해 의거해야만할 문헌이 아닌 것에 붓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1902년 나이또 코난(內藤湖南)에게서 {元朝秘史}文廷式抄寫本을 받자 이미 나이 오십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어를 獨習하여 6년후에 飜譯·硏究를 이루어 내었다. {古事記}의 문체를 모방한 流麗한 譯文은 旁譯의 直譯體 漢文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漢學者의 장점도 있어, 실질적으로 세계에서 최초의 역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성과물이었다. 덧붙여 조문마다 행해진 注譯·考證은 {元史}를 비롯하여 다량의 한적을 구사한 詳細·細緻의 극에 달한, 문헌사학의 精髓이라고도 불릴만한 것이었다. 당시 {元朝秘史}의 譯으로써는 러시아의 빠라디(A. )에 의한 총역에 근거한 譯書밖에 없고, 거기에 갑자기 출현한 나까역주는 세계의 학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책이 초창기에 있어서 ‘日本東洋史學’의 不朽의 名著라고 말해지는 까닭이다. 이것을 계기로 {원조비사}의 번역·연구는 세계에서도 한창이 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내외에서 공히 ‘元朝秘史學’이라고까지도 부를만하게 진흥됨을 보였지만 이러한 것의 기초는 거의 나까역주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완전한 역사문헌고증은 그후의 일본의 몽골학의 모범과 지침이 되어, 역시 그 대부분은 지금도 역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나까는 글자 그대로 畢生의 譯業을 끝낸 후 급서했다. 일본의 몽골시대사연구가 이러한 原典史料의 근본연구를 가지고 시작한 것을 여기에서 특기하고 싶다.
그 후 일본에서는 {원조비사}에 관해서 나까역주에 전면적으로 의거해서 각종의 몽골연구가 계속되게 되었는데, 그 반면에 그것에 의지한 나머지 오히려 {원조비사} 그 자체의 연구는 일시정체했다. 역으로 歐美·러시아에서는 주요한 몽골학자·알타이학자의 대부분은 어떠한 형태로 이의 연구에 참가했다. 제2차대전후 일본에서도 고바야시 코오시로우(小林高四郞)·무라우에 쇼우지(村上正二)·오자와 시게오(小澤重男) 등에 의해 再興했는데, 여러 외국에서의 자극이 크다. 이것은 戰前의 일본에서의 몽골연구가 의외이지만은 반드시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文獻學硏究에는 지향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나까에 이어서는 시로토리 쿠라요시くらきち?(白鳥庫吉, 1865∼1942)와 쿠와바라 지쯔죠(桑原 藏, 1870∼1931)라는 2명의 동양사학의 선구자를 들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쪽도 연구분야는 아시아전역에 걸치고, 특히 시로토리는 ‘塞外史’, ‘西域史’, 쿠와바라는 ‘東西交通史’, ‘東洋文明史’의 개척자가 되었는데, 각각 몽골시대사연구에도 큰 영향과 발자국을 남겼다. 시로토리는 아시아諸民族史의 연구에 言語學 등의 지식을 도입하여 많은 새로운 면을 열었다. {元朝秘史}에 관해서도 나카의 뜻을 계승하여 漢字音寫의 몽골어復元을 시도한 {音譯蒙文元朝秘史}(1942)를 내놓은 외에, 몽골시대사에 관계하게 되는 많은 연구자를 육성했다. 한편 {中等東洋史}上下(1898)·{東洋史敎授史料}(1914)에 의한 일본의 동양사교육의 틀을 정했다고도 알려진 쿠와바라는 {宋元의 提擧市舶西域人蒲壽庚의 事蹟}(1922)을 저술하여, 宋元交替期에 있어서 무슬림해상세력의 실태를 精緻한 文獻實證을 통해서 활자화했고, 일본의 학문수준의 높이를 세계에 인상짓게 했다. 둘은 연구의 방법·관심에서도 달랐지만, 공히 한문사료를 전거로 하여 브레트슈나이더(E. Bretschneider), 쌰반느(E. Chavannes), 히르트((F. Hirth), 율(H. Yule) 등의 서구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기개를 넘쳐 있었다. 元末 王大淵의 저작 {島夷誌略}을 校注하는 등 ‘南海史’의 기초를 세운 후지다 토요하찌(藤田 八, 1869∼1929)도 포함하여 그들에 의해 중국과 그밖의 지역과의 교섭·관계사연구의 선구를 이루고 있는데, 그 때 바다의 동서가 연결되어있던 몽골시대는 가장 알맞은 주제가 되었다. 덧붙여 중국을 기점으로 하는 歷史事象에 관해서 西歐人의 연구의 섭취·비판에 입각한 위에서 漢文記事의 정밀한 분석·고찰을 행하려는 방법은 일본인학자로써는 가장 빨리 잘 다루고 유효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이후 한문사료의 이용은 日本人史家의 특기라고도 불려질 정도가 되었는데 몽골시대사연구에 관해서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적당하여, 元朝史·滿蒙史에서 동서교섭사를 더하여 이른바 3위1체의 모습을 중국을 중심으로 한 漢籍硏究가 공통의 기본자세로 되어갔다.
元朝史에 관해서 수많은 중요한 국면을 다룬 최초의 실증연구를 행한 것은 야부찌 ??(箭內亘 ; 실은   왼쪽의 심변이 없는 글자, 875∼1926)이다. 그는 초기의 몽골정권과 元朝의 政治機構·軍事組織·社會制度 등의 기본문제를 주로 한문사료에 의해 고찰하여, 그 논문들은 沒後 {蒙古史硏究}(1930)에 정리되었다. 오르도(ordo), 케시크(ke ig), 쿠릴타이(quriltai), 遊牧官制·軍制, 色目人, 身分制 등 몽골지배의 특징을 이룬 중요문제가 다루어져,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전의 동양
사학자는 특정의 시대에 연구대상을 한정한 것은 드물게 있었지만, 몽골시대에 대상을 맞춘 야부찌는 그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야부찌의 이 자세는 중국사의 전문가들로부터 다소간 비난을 받았지만, 몽골시대사는 그만큼 횡적으로의 다양한 넓이를 가지게 되고, 이 시대에 통용의 가장 기초를 이룬, 논제에 심혈을 기울여 바로 정면으로부터 향해 섰던 야부찌의 진지함, 성실함에 敬服이외에는 없다. 51세라고 하는 너무 짧다고 생각되는 생애가 좀 더 작은 시간만이라도 주어졌다고 한다면 일본의 몽골시대사연구의 양상은 지금과는 많이 변한 것이 되어있지는 않을까? 야부찌가 당시의 史料段階에서 제시한 짜임새에 오늘날도 의거하여 충분하다고 하고 있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후진의 문제이다.
몽골사도 포함한 내륙아시아 여러 민족의 역사연구에 완전히 새로운 전개를 가져온 것은 하네다 토오루(羽田亨, 1882∼1955)였다. 그는 시로토리 쿠라요시(白鳥庫吉)의 영향을 받아, 알타이계·이란계 여러 언어에도 통해, 내륙아시아사의 연구에 한문문헌의 이외에 각종 現地語文獻에 의거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敦煌文獻·위구르文書·突厥碑文 등 田籍史料가 아닌 生材料를 이용하는 길도 그에 의해 개척되었다. 하네다의 本領이라고 할 수 있는 ‘西域史’에 관한 저술 {西域史文明槪論}(1931), {西域文化史}(1947)등 그 주요한 著作을 모은 {羽田博士史學論文集}上下(1957)를 보면 言語文獻學을 무기로 곤란한 內陸아시아史象의 재구성에 접근하려고 한 의기와 기백이 전해 온다. 몽골시대사에 관해서는 [元朝秘史에 보이는 蒙古의 文化], [元朝驛傳雜考], [元朝의 漢文明에 대한 態度] 등을 저술해 뛰어난 見識을 披瀝한 이외에 많은 뛰어난 연구자를 양성했다. 하네다가 제시한 방법론은 오늘날에서야말로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실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엄정한 원전연구가 모든 것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元朝崩壞後의 몽골에 관해서는 와다 세이(和田淸, 1890∼1963)가 한문·몽골어 양사료를 사용하여 精査했다. {東亞史硏究}蒙古編·滿州編(1955·1959)에 집대성된 論考는 전임의 야부찌의 衣鉢을 계승하여 丹念한 문헌실증에 철저하고 있다. 戰前·前後를 통해서 그의 아래에서 몽골시대사의 전문연구자가 배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서 나카 미찌오(那珂通世)·야부찌 ??(箭內亘)·하네다 토오루(羽田亨) 등의 기초위에 제2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일제히 출현하여 각종의 개별적인 주제를 추구한 연구가 전개하기 시작한다. 단지 그들의 연구는 각각의 사람에게서 다소의 차이는 있는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후에 오히려 실증과 연결한 연구의 이른바 萌芽에 해당한다고도 보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음 항에서 종합해 서술하려고 한다.

2) 前後의 主要한 動向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는 일본의 동양사학을 둘러싼 정황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켰다. 일본은 대륙에서 撤退하여, 현지학술조사 등의 길은 끊어졌다. 일본의 대륙확장시대에는 국가정책마저 가까운 어감을 지니고 있던 [동양사]는 그 단어의 배경인 정치·사회상의 요청을 잃고, 단지 학술상의 용어가 되었다. 게다가 교육과목으로서의 ‘세계사’가 성립한 결과 국민교육상의 특별한 의미에 맞춤도 없어져 역으로 순수한 학문분야가 되었다.
中日戰爭의 심화와 함께 ‘異民族統治史’의 색채도 함께 띄고 있었던 일본의 몽골시대사연구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수가 대륙에 있던 연구자가 철수했다. 대륙정책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依託事業이나 關聯硏究도 모습을 감추었다. 戰前의 동양사학의 가운데 가지고 있던 독자의 입장은 없어졌다. 前後 잠깐 표면상에서는 연구가 침체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오히려 전전을 질·량 공히 훨씬 상회하는 活況이 도래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戰前·戰中·前後直後에 걸쳐서 다음 대를 짊어질 수많은 연구자들이 대체로 이미 연구생활을 개시하고 있거나 혹은 대학에서 硏鑽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 국가의 강력한 요청이 없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연구의 시간이나 몰두하는데 여유가 생겨 발상이나 주제설정의 위에도 ‘滿蒙’, ‘東亞’, ‘南洋’이라고 하던 테두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연구의 재료는 풍부하게 있었다. 종전까지 축적되어 있던 각종의 학술조사나 기초연구를 정리하거나 재검토하거나 하는 움직임의 한편에서 우선 있었다. 무라다 지로(村田治郞, 1895∼1985) 他編 {居庸關}(1957)은 그 현저한 예이다. 居庸關過街塔의 洞壁에 새겨진 산스크리트, 티베트, 팤파字, 위구르, 西夏, 漢字의 六體文字의 다라니(陀羅尼)와 建立緣起에 관해서, 각 전문가가 정밀한 언어문헌학 해독을 하여 전후의 일본동양학의 재생을 알리는 확실히 기념물이 되었다. 여기에 투입되어 열매 맺은 지견이나 역량은 그후 각각의 언어문헌연구에의 기초가 되고, 飛躍臺도 되었다. 또 가미우에 나미오(江上波夫, 1906∼ ) 등에 의한 옹구드( ngg d)王城趾 올론 스무(Olon s me)의 보고도 戰前의 조사를 종합한 것이고, 타사카 오끼미찌(田坂興道, 1912∼1957)에 의한 몽골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무슬림연구의 최고걸작 {中國에 있어서 回敎의 傳來와 그 弘通}上下(1964) 등도 戰前부터의 연구활동을 집성한 것이리라. 조직력에 의한 기초문헌의 정리·해독이 추진된 것도 前後의 특징으로 京都大學文學部 編 {元史語彙集成}上中下(1961∼1963), 고바야시 고시로·오까모토 케이지(小林高四郞·岡本敬二) 編 {通制條格의 硏究譯註}上中下(1964∼1976), 이와무라 시노부·다나카 켄지(岩村忍·田中謙二 編 {校定本元典章形部}2冊(1964·1972) 등이 공간되어 연구상, 큰 편의를 가져왔다.
그런데 前後의 活況을 우선 1970년경까지를 일괄해서 중심이 되는 연구자마다 간단히 되돌아보려고 한다.
우선 終戰前後에 찬연하게 빛나던 분은 마에다 나오노리(前田直典, 1914∼1949)이다. 그는 [元朝行省의 成立過程]에 의해 옛날부터 현안이었던 行省의 문제를 거의 해결로 인도한 이외에 [元代에 있어서  의 發行制度와 그 流通]이하의 여러 편을 저술했다. 元朝財政의 특징을 이룬 紙幣制度와 그 운용, 나아가서는 물가변동까지 극명하게 논했다. 그가 극히 짧은 생애의 끝무렵, 그리고 연구생활로써는 수년에도 차지 않는 짧은 기간에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차례로 발표한 수편의 논고는, 사후 {元朝史의 硏究}(1973)로 정리되었는데 그것을 보면 간단히 博引旁證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철저한 문헌실증과 투철한 역사통찰, 게다가 티끌만큼도 소홀히 함이 없이 엄정한 논리구성이 깊은 감동을 준다. 때로는 놀라울 정도의 산뜻함을 느끼는 것마저 있다. 확실히 문헌사학의 이상의 본연에 가깝다. 그는 終戰前後의 어지러운 東大東洋史硏究室에서, 유라시아연구에 필요한 여러 언어의 修得이나 마땅히 그러해야할 東洋史學의 議論에 뛰어난 지도력과 견식을 발휘하여 “개인교수(private professor”라는 異名으로써 불렸다고 한다. 짧으면서도 강렬한 그의 영향은 그 뒤의 일본의 학계를 각 분야에서 짊어지게 된 카나다 노부오(神田信夫)·모리 마사오(護雅夫)·야마다 노부오(山田信夫)·혼다 미노부(本田實信)·시마다 죠우헤이(嶋田襄平) 등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미쳤다고 들었다. 세상에서는 그 이름은 말년의 병상에서 썼다고 하는 [東아시아에 있어서 古代의 終末]로 알려졌지만, 필자 등에게는 그것은 마에다의 本領이 아니라 자신의 생의 등불로써 어쩔 수 없이 그리한 것으로 말하자면 원래의 餘技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보인다. 필시 그의 포부는 유라시아전역의 역사구성에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지금 우리들 후진은 남겨진 논고의 주옥같은 一條一條를 후세에의 유산으로 熟讀玩味하고 싶다.
戰前·戰後를 통해서 중국학의 두터운 전통을 배경으로 한 끈기 있는 문헌연구와 독자적인 着想·文體로 강력하게 일본의 학계를 선도한 것은 아베 타케오(安部健夫, 1903∼1959)이다. 비슈 바리크(Bi -bal q)가 어디에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최종과제로하여 위구르 遊牧國家解體後의 天山地區에 있어서 위구르왕국의 歷史를 추적한 {西위구르國史의 硏究}(1954)는 元代漢籍의 경탄할만한 博搜와 西方史料·위구르문서의 기존연구의 철저이용에 의해, 흡사 몽골시대사 관계사료의 “福袋(복주머니)”와 같은 모습을 드러내어 내외를 불문하고, 위구르사가는 물론 원조사·중앙아시아사 등의 연구자에게도 필독의 책이 되었다. 아베는 [元代投下語源考], [元時代包銀制考究], [元代知識人과 科擧] 등 沒後 {元代史의 硏究}(1972)에 수록되었던 여러 편에서 元朝史에 독자적인 분석을 시도한 이외에 京大人文硏에 있어서 {元典章}共同硏究班을 주재하여 곤란한 同書해독에의 길을 열었다. 그의 급서의 후, 끝끝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同書역주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은 그만큼 아베의 존재의 위대함을 말한다.
고바야시 고시로(小林高四郞, 1905∼1987)는 戰前부터 {元朝秘史}를 중심으로한 연구활동을 계속하여 1940년에 그의 譯 {蒙古의 秘史}를 공간하여 세상에 同書를 펼침과 동시에, 전후 그 언어문헌학연구를 집성한 {元朝秘史의 硏究}(1954)를 발표하여 同書硏究의 수준을 제고시켰다. 풍부한 해외체험과 뛰어난 어학력을 살려서 다채로운 활동을 행하고 그 주요한 논고는 {몽골史論考}(1983)에 정리되었다. 몽골시대사연구에서 페르시아어문헌이 불가결한 점은 일찍부터 말하여, 戰時中 이스탄불에서 {集史}1317년 寫本을 비롯한 페르시아語史書古寫本의 사진을 비롯해 일본에 가져와 후진을 도왔다.
이와무라 켄지(岩村忍, 1905∼1988)도 또한 실로 폭넓은 학술활동을 전개하여 書齋에 머물던 일본의 동양사가의 가운데에서 이채를 발했다. 戰前 이미 {十三世紀東西交涉史序說}(1939), {蒙古의 歐洲遠征}(1941), {蒙古史雜考}(1943) 등으로 중국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식견을 피력했지만, 전후는 京大人文硏에서 아베沒後의 {元典章}연구반을 담당하거나하는 등 純文獻學硏究의 기풍속에 몸을 둠과 동시에 이란·아프카니스탄·파키스탄 등에서의 학술조사에서는 유례없는 행동력을 발휘하여 Zirni Manuscript의 발견을 가져왔다. 몽골시대사에 관계되는 논거를 묶어서 大著 {몽골社會經濟史의 硏究}(1968)에는 유목민사회에의 통찰과 {元典章}의 문헌연구가 잘 넣어져 있다. 세계를 여기저기 돌아다닌 이와무라는 바로 토인비(A. Toynbee)류의 역사가라고 하기에 어울리고, 그것에는 세계제국이었던 몽골의 연구가 表裏一體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戰後를 풍미한 征服王朝의 생각을 주창한 것은 타무라 미?(田村實造, 1904∼ )이다. 타무라는 遼代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몽골시대 및 북아시아 출신의 遼金元 3대왕조를 통해 공통하는 기본성격이 있는 것을 논파했고, 그것들의 논거를 집대성하여 {中國征服王朝의 硏究}上中下(1962∼1982)로 공간했다. 타무라의 시야는 북아시아사의 입장에서 중국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遼朝에 있어서 牧農伏閤의 二重體制를 기본상으로 하여 원조의 분석에 이르려 것은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역사세계로써 파악하는 목표를 포함한다. 그 결과 정복왕조론이 갑자기 활발해지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논의를 벗어나 [정복왕조]라는 말이 단독으로 가지가지에서 사용되어 때때로 일종의 Catch-phrase에 까지 된 등의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戰前이래, 元朝史의 전문연구자로써 활약을 계속하던 사람은 *오타기 마쯔오(愛宕松男, 1910∼ )와 무라우에 쇼우지(村上正二, 1913∼ )이다. 오타기는 전전 이미 [元代의 都市制度와 그 起源], [李王亶의 叛亂과 그 政治的 意義], [元朝의 代漢人定策] 등의 뛰어난 착상을 나타내는 한편 {忽必烈汗}(1941)이나 [蒙古史]後編·近古에서 傳記·槪說作者로서의 탁발한 자질을 보였다. 戰後는 {愛宕松男東洋史學論集}1∼5(1986∼89)에 수록된 契丹史·陶磁生産史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여러 편의 이외에 각종의 역사 시리즈물에 健筆을 떨쳤다. 元朝史의 파악에 관한 그 특유의 見解나 理論은 속칭 “愛宕 Schema” 등이라고 불렸고 중국사의 다른 시대의 연구자에게도 환영되고 또 그의 책을 읽고 이 시대의 연구를 지향한 일군의 후진에게도 지금도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더욱이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여행기의 譯註 {東方見聞錄}上下(1970)는 리치(A. Ricci) 英譯本에서의 轉譯한 것이지만 각종의 注記에는 歐美의 史家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도 많아서 유익하다.
무라우에는 칭기스칸( inggis qan)의 出現前後부터 元朝一代에 걸친 歷史現想全般을 집중연구하여 바로 몽골·元朝史의 專門家라고 부르기에 어울린다. 俎上에 올려진 논제는 投下·奧魯(a’uruq)·奄出(em )·소유르갈(soyur al)·斡脫(art q > artoq) 등의 몽골시대 독특하게 중요한 문제를 비롯하여 칭기스칸국가의 성립을 둘러싼 名篇 [칭기스汗帝國成立의 過程], [몽골部族의 族祖傳承] 등 지극히 多岐하다. 특히 畢世의 大業이라고도 부를만한 {몽골秘史}1∼3(1970, 1972, 1976)는 나카譯註이래 수십 년을 거쳐 나타난 {元朝秘史}의 본격적인 譯註이다. 각 절마다 붙여진 방대한 注記는 세계각국의 재래의 연구성과를 널리 소개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뿐만 아니라 종종 무라우에 자신의 推論이나 假說을 첨가하여 나아가서는 때로는 대담한 착상에 이르기까지 기탄 없이 보여주어, {秘史}를 축으로 하는 몽골시대사연구의 一大箚記集같은 느낌마저 나타내고 있다. 후진을 裨益할 것 대단히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구찌 토오루(佐口透, 1916∼ )도 또한 戰前부터 연구생활을 개시하여 특히 중앙아사아를 중심으로 몽골시대부터 나아가서는 그 후 러시아·청조의 통치에 이르는 가지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戰前에 공표한 {차가타이 한( a atai qan)과 그 시대], [몽골인 支配時代의 위구르스탄(Uyghuristan)], [元代의 타림(Tarim)南邊地域]은 그때까지 일본의 연구에서 빠져있던 부분에 빛을 준 것이고 , [十四世紀의 元朝大카안(Qa'an)과 西方三王家와 그 連帶性에 관하여]에서는 몽골諸王家의 友好關係를 볼만하게 지적하였다. 戰後 “몽골의 繼承國家”라는 관점에서 연구대상을 점차로 후대로 내리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도손의 명저 Histoire des Mongols를 日本語譯하여 점차로 세상에 내 놓아({몽골帝國史}1∼6, 1968∼1979), 전문연구와 일반의 계몽의 쌍방에서 절대적인 공헌을 담당했다. 또 {東西文明의 交流}의 제4권에 {몽골帝國과 西洋}(1970)을 단독집필하여 몽골期의 동서교류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묘사하고, 권말의 文獻解題와 동시에 硏究者必備의 책이 되고 있다.
지금은 敦煌學의 泰斗로서 내외에서 공히 이름이 높은 *(藤枝晃, 1911∼ )는 몽골시대사연구자로써 연구활동을 개시하여 많은 업적을 올리고 있다. 일찍이 1930년대에 {마르코 폴로 여행기의 近刊諸校注本에 관하여], [同補遺二則], [마르코 폴로가 傳한 蒙疆의 事情] 등의 여러 편을 저술한 것 이외에 戰後 이윽고 {征服王朝}(1948)를 公刊하여 주로 元末에 宋遼金史의 編纂에 관한 政治背景과 文化情況을 극명하게 재현했다. 종래 同書는 정복왕조라고 하는 용어를 일본에서 최초로 사용했다고 하는 것으로 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책자에 가까운 체재이면서도 元代의 歷史·文學硏究는 도대체 어떻게 진행해야할 것인가를 널리 논구하고 그 물음에 대한 이유는 지금도 더욱 深刻하다. 天山위구르王國에 관한 [高昌回 과 龜 回 ]도 잊혀지기 어렵다.
東西交涉史家로서 알려진 *마에지마 신지(前嶋信次, 1903∼1983)도 몽골시대에 관한 연구를 많이 남겼다. [泉州의 波斯人과 蒲壽庚], [元末의 泉州와 回敎徒]는 선행한 쿠와바라 지쯔죠(桑原 藏)의 연구를 이어 泉州의 이슬람사회를 연구하고 [忽必烈樞密副使博羅考], [舍利別考] 등 몽골기의 동서교류를 다룬 여러 편도 동시에 {東西文化交流의 諸相}(1971)에 수록되었다.
보기 드문 견식과 명문장으로 이름 높은 *우에무라 신니(植村淸二, 1901∼1987)는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티무르(Timur)조 연구자로써 알려져 있지만, 몽골시대에 관해서도 [元朝秘史小記], [乃蠻小考] 이외에 [察合臺汗國의 興亡]이라는 제목으로 연작을 발표하여 올리버(E. E. Oliver) 등의 연구를 본보기로써 漢文史料를 활용하여 불명한 점이 많은 차아다이울루스( a atai-ulus)史의 通觀을 시도했다. 발트리트의 연구도 한문사료와 그 조합까지에는 손이 미치고 있지 않는데, 우에무라의 논고는 지금도 충분히 참조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護雅夫, 1921∼ )도 戰時中에 [探馬赤部族考序說], [元代에 있어서 探馬赤部族에 관해서]의 두편을 公表하여 연구를 개시했다. 후에는 中日兩國의 硏究者의 “探馬赤軍論爭”이라고도 할만한 應酬가 일어났는데 이 두편은 그 최초의 논고였다. ?護는 戰後에도 [노코르(N k r)考 序說 -주로 主從關係成立의 事情에 관하여- ]나 [元朝秘史에 있어서 ∼《oboq》의 語義} 등을 발표하여 犀利한 끊는 맛을 보였는데 후에 만난 *야마다(山田信夫)와 함께 위구르문서연구에도 손을 대어 匈奴·突厥硏究에서 나아가 西아시아, 이슬람, 투르크연구에까지 연구대상을 확대했다. 몽골시대를 기점으로 바다의 동서, 시대의 전후, 행하고자 하여 무엇 행하지 못한 것 없었던 활약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일반에서 꽤 이전부터 몽골시대연구의 "西漸"이라고 해도 좋은 방법으로 동시대에 ?? 손덴 것이 특히 서아시아에로 연구영역을 擴大·轉進한 현상이 지적되고 있는데 ?護는 바로 그 한사람이라고 불린다.
*하기바라 준뻬이(萩原淳平, 1921∼ )는 명대몽골사의 연구에서 거슬러 올라가, 近年 元朝史의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칭기스칸政權에서 쿠빌라이(Qubilai)의 元朝成立에 이르는 약 반세기 사이에 순수한 遊牧軍事政權에서 漢民族과의 협력에 의한 安定政權樹立에의 試行錯誤의 시기를 다루어 그 사이를 묶는 것으로서의 칭기스칸으로부터 중국방면을 위임받은 자라이르( alair)족의 左翼萬戶長 무카리(Muqali)一門과 그 麾下集團을 들어 [木華黎王國의 成立過程에 관하여], [木華黎王國에 관하여, [木華黎王國下의 探馬赤軍에 관하여], [다시 木華黎王國下의 探馬赤軍에 관하여 -陽志玖氏의 批判에 答하여] 연작을 발표했다. 하기바라의 표적은 종래의 정복왕조론이 지배자측의 변용만을 강조한 점이었던 것을 在地의 各層의 인물도 다루려고 한 것이었다. 探馬赤軍도 그 立論의 一環이었는데 하기바라說이 계기가 되어 探馬赤軍 그것에 관한 논쟁이 중일양국에서 일어났다.
*야마다 신오(山田信夫, 1920∼1987)는 *하네다 쿄우(羽田亨)가 시작한 위구르문서연구가 絶學되려고 하던 것을 다시 일으켜 가바잉(A. von Gabain)을 비롯한 세계의 위구르학에서 일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초를 굳혔다. 근년의 연구의 진전에서 위구르문서의 대부분은 몽골시대에 속하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데, 야마다는 위구르문서가 과연 언제 것이었는가 완연하면, 歷史史料로써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 아직 확실한 예상이나 成算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부터 이 분야에 몸을 던져 위구르문서를 구해 세계각지의 연구기관·소장기관을 遍歷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위구르문서가 그의 손에서 그것으로 밝혀지고, 또 많은 사진·필름이 일본으로 건너 갔다. 널찍한 인격은 내외의 연구자에서 사모받아, 유라시아史硏究의 國際交流를 促進했다. 많은 힘을 들여 보답 받는 것 반드시 많지 않은 분명히 힘든 원문서연구의 길을 연 야마다의 용기와 노력에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한다.
일본에서 페르시아語史書에 기초한 역사문헌연구를 본격 도입한 것은 *혼다 미노부(本田實信, 1923∼ )이다. 戰後에 연구생활을 개시한 혼다는 우선 [成吉思汗의 十三翼에 관하여], [칭기스칸의 千戶 - {元朝秘史}와 라시드{集史}와의 비교를 통하여]의 두편을 公刊했다. 몽골草創에 걸친 2대 문제를 {元史}, {集史}, {元朝秘史}의 3대 사료 등을 철저한 精査에 의해 解明했다. 이미 이 두편의 논고 중에 후의 혼다의 기본자세가 명확하게 보이는데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이란학의 泰斗로서 몽골조 이란의 著作도 있는 미노르스키(V. T. Minorsky)의 아래에서 硏鑽에 힘썼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프레그 울루스史를 중심으로 몽골의 국가제도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주로 추구했고, 많은 뛰어나고·중후한 연구성과를 점차 발표함과 동시에 이란사·이슬람사·몽골사에 걸친 有爲의 연구자를 다수 육성하고 있다. 그 주요한 論考는 최근간인 {몽골時代史硏究}(1991)에 집성되었다. 몽골시대사라고 이름 지워진 논저는 실은 이것이 가장 최초이고, 수록된 논문은 어느 것이나 原典諸語文獻의 음미에 바탕한 근본연구이다. 모두 시간을 뛰어넘어 통용될 것들뿐이다. 일본에 있어서 몽골시대사연구는 本書의 출현으로써 특별한 수준에 달했다고도 하더라도 과언은 아니다. 今後 우리들 후진은 이 책을 새로운 기점으로 하여 연구의 展開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明淸時代의 몽골사를 중심으로 실로 폭넓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오까다 히데코우(岡田英弘, 1931∼ )도 元朝史硏究에서 출발하여 지금도 가끔 그곳에 되돌아간 논고를 발표한다. 초기의 [元의 藩王과 遼陽行省], [蒙古史料에 보이는 初期의 蒙藏關係]는 線密한 문헌고증에 의한 귀중한 노작이고, [順帝悲歌의 源流], [도르벤 오이라트(D rben Oirat)의 起源]도 연구자 필독의 논고이다. 또 일반에 향해서도 山川世界各國史 {北아시아史·新版}[몽골]의 項(1981)에는 종래의 개론에는 보이지 않는 오까다 독자적인 歷史像이 저술되어, 이것을 어떻게 씹을까 개개의 연구자에 묻고 있다.
몽골語學者로써 오랫동안 {元朝秘史}에 걸친 논고를 발표하고 있는 *오자와 시게오(小澤重男, 1926∼ )는 근년 그 기초의 위에서 {元朝秘史全釋}1∼3, {同續攷}1∼3(1984∼1989)의 大著 6책을 公刊했다. 언어학자이면서의 飜譯·考察에 가득찬 일본의 [元朝秘史學]은 무라우에(村上)역주에 이어서 새로운 비약을 이루었다. 각권말에 첨부된 위구르文字에로의 還元案은 內蒙古의 亦隣眞도 마찬가지의 시도를 피력하고 있고 {元朝秘史}의 연구는 드디어 우리들을 끌어들여 마지않는다.
이상, 간단하게 소개한 연구자 이외 戰前·戰後를 통해서 *이시다???(石田幹之助)·이께우찌 히로시(池內宏)·타야마???(田山茂)·사꾸라이???(櫻井益男·아오끼 ?(靑木富太郞)·고노 가유미(小野川秀美)·후지노 효(藤野彪)·이와사 세이찌지로(岩佐精一郞)·오까모토 ???(岡本敬二)·아오야마???(靑山公亮)·야마구찌???(山口修)·이노자끼???(井ノ崎隆興)·나까다 요시노부(中田吉信)·??????(惠谷俊之)·??토모사브로(丹羽友三郞)을 비롯하여 法制史의 아리다까????(有高巖), 佛敎史의 노가미????(野上俊靜)·이나바???(稻葉正就)·이와이???(岩井大慧)·시게마쯔???(重松俊章)·小笠原宣秀·小川貫壹, 全眞敎史의 窪德忠, 티베트사료에 관해서 테라모또???(寺本婉雅)·하시모또???(橋本光寶)·사또우???(佐藤長), 中國文學·元曲硏究의 요시가와???(吉川幸次郞)·다나까???(田中謙二), 몽골언어학의 핫토리???(服部四郞)·무라야마 시찌로우(村山七郞)·나가타 나쯔키(長田夏樹)·야마자끼(山崎忠), 西夏語의 니시다 류오(西田龍雄), 遊牧史·民族史의 고토우???(後藤寫(실제는 富자에 꼭지 없는 글자)男), 科學史의 ??????(藪內淸), 陶磁交流史의 미카미 지로(三上次男)·사쿠마 시게오(佐久間重男), 美術史의 스즈끼 케이(鈴木敬)·스기무라???(杉村棟) 등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들 顔觸된 이외에도 宋代史硏究者의 속에서 元朝史에도 걸치고 있는 자도 제법있고, 관련하는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하나하나 열거한다면 방대한 수에 이르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를 割愛할 수 없다.

3. 現況과 今後의 展望

1. 近年의 趨勢와 特徵

첫 번째로 전공자의 대폭적인 젊은이로 바뀐 것이 두드러진다. 종래, 일본의 몽골시대사 연구는 60세대이상의 이른바 제2세대의 연구자가 주력이었다. 이것에 이어지는 연령의 연구자가 한 시기, 출현하지 않아 세대상의 단절과 연구상의 쇠퇴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근년 30∼40세대의 전공자가 激增하였고, 게다가 그 경향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연구자의 세대교체와 절대수의 증가에 동반한 연구의 方法·傾向·關心·主題도 변화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新史料·新情報의 紹介·導入·利用이 한창인 것이다. 漢文史料에 관해서는 종래 어떻게든 망라해서 이용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있었지만 각종의 원대문집의 속에서 미사용의 유익한 기사를 찾아내는 작업이 열심히 진행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臺灣등지에서 元刻本을 포함한 근본이 되는 많은 刊本이 영인출판되어, 이제까지에 비교하여 格段으로 이용하기 쉽게된 점이다. 덧붙여 陸峻嶺 編 {元人文集篇目分類索引}, 周淸澍 {元人文集版本目錄}, 王德毅等 編 {元人傳記資料索引}, I. de Rachewlitz & M. Wang, Repertory of Proper Names in Y an Literary Sources(元朝人名錄, Ⅰ∼Ⅲ, Taipei 1988)가 간행되어 원대문집의 검색이 용이하게 되었다. 문집이용열은 한층 고조될 것이다. 문집이용의 성행과 함께 石刻史料의 중요성이 점차 인식되어 때마침 대만에서 각종의 石刻書, 石刻目錄類 나아가서는 明淸民國期의 地方志에서의 石刻記事部分을 彙集·影印한 {中國石刻史料新編} 1∼3編이 출판된 것이 중용하고, 지금 수년, 석각사료의 이용이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이미 上記書의 출판에 앞서 明淸民國地方志에서 몽골時代 關聯記事를 발굴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계속한 *모리타???(森田憲司)와 같은 인물도 있고, 석각열은 한층 고조를 맞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페르시아語 史料에 관한 古寫本의 이용이 당연한 것이 되어 종래 거의 미처리 그대로 머물러 있던 系譜史料 {五分枝( u’ab-i Pan g na)}의 기초연구도 시작되었다. 몽골시대의 주요한 이슬람사료는 사진·필름 등의 형태로 사본이용의 편의가 가지런하게 되었다. 漢文記事의 손이 닿은 中央아시아 以東의 지역에 관해서는 {集史}, {밧사프史(Ta’r -i Va f)}, {올제이투 술탄의 역사(Ta’r -i l t Sul n)} 등의 페르시아語史書의 記事와 關係하는 記載를 {元史}, {참적(站赤)} 이나 각종의 문집 등에서 찾아내는 작업도 행해지고 있다. 西아시아方面의 관해서는 *시모????(志茂碩敏)에 의해 프레그 울루스의 구조가 고사본의 이용에 의해 일단, 극명하게 재현되는 것 일찍이 일본에서는 아무리해도 또 얻을 수 없었던 아르메니아어·그루지아어 문헌의 본격이용도 기타가와 세이이찌(北川誠一)에 의해 개시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연구의 방법·관심이 매우 크게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漢文史料를 주된 사료원으로 한 연구자에 관해서는 종래의 사료상황에서는 여전히 곤란하였던 지역성이 강한 문제가 즐겨 취급되도록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면 특정의 제한된 小地域史나 社會史·民衆史·信仰史 또는 지식인층과 민중문화의 문제 등이다. 그 때문에 원래 宋代史나 明代史가 전공이었던 사람들이 원대사에 진출하는 경향이 보인다. 개략해서 말하면 종래 일본의 漢文文獻硏究者의 사이에는 한문문헌 이외의 지식이 요구되던 몽골시대를 회피하는 傾向·氣風이 장기간 있었다. 그런데 근년에는 오히려 이 시대야말로 다른 시대는 파악하기 어려운 민중이나 사회의 실태를 오히려 파악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 향방과 함께 재래의 통설이나 선행연구를 각종의 문집·석각 등에서 획득한 新情報에 의한 補遺·修正하는 시도도 눈을 끈다. 이것은 史料狀況의 良化와 연구자의 증가에 동반하는 당연한 결과이지만 종종 안이한 길로도 떨어지기 쉽다.
한편 페르시아語 史料의 보급과 동시에 그것들에 보이는 몽골통치집단관계의 풍부한 기사를 活用·集成하여 때로는 한문사료 그밖의 것과도 조합하여 몽골시대정치사를 근본에서부터 再構築하려 하거나 혹은 유목국가·유목관제의 분석·파악을 위한 기초재료로 하거나 하는 움직임이 현저하다. 나아가서는 페르시아어 사료와 {元朝秘史}와 상호분석을 시도한 것도 일부에 보인다. 필시 이러한 연구방향이 당분간 일본의 몽골시대사연구의 한편의 주력이 될 것이다. 이란방면에 관해서는 지배자몽골 뿐만이 아니라 치하의 이란인이나 이슬람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움직임이 보인다. 또 바쿠프(vaqf)문서 연구의 일환으로 라시드 압딘의 財産寄進文書를 계속 읽거나, 몽골에 의한 도시건설의 문제를 취급하는 연구도 나타나고 있다.
네 번째는 언어문헌학상의 지식이 종래 이상으로 중시되어 가는 것이다. {元典章}, {通制條格}을 비롯하는 元代漢籍에 빈번하게 보이는 蒙古語直譯體風의 白話漢文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蒙古語의 最低限의 기초지식이 불가결한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덧붙여 가지가지로 漢字音寫된 非漢語의 人名·地名·術語의 파악을 위해서는 蒙古語뿐만 아니라 위구르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아라비아어·티베트어·산스크리트 나아가서는 소그드(Sogd)어 마저도 필요할 뿐 아니라 역으로 元代漢語音韻의 素養도 요구되는 것이 점차 공통적인 인식으로 되고 있다.
한편 {集史}를 비롯한 페르시아語 史料에는 대량의 蒙古語 투르크어와 그밖의 어휘가 빈출한다. 종래 이것들에 관해서는 데르퍼(G. Doerfer)의 폭넓은 辭書風硏究書가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역시 어학자이고 각각의 어휘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사면의 洞察·解析에는 익숙하지 않다. 데르퍼를 참조하면서도 직접으로 고사본에서 다시 돌아가 우선 확인하고, 게다가 각각의 출현 箇處를 그 문맥 歷史事情으로 비추어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어휘는 역사상 몽골지배의 根幹에 관한 경우에 관한 경우가 많은 만큼, 그 의미 내용의 철저음미는 몽골시대사연구의 알맞은 실마리가 된다. 요컨대 한문사료와 페르시아語 史料라는 2대사료의 어느쪽을 이용하는데에도 {원조비사}나 각종의 蒙古語·위구르어·투르크어 문서·비각에 관한 지식이 정리·활용되는 것이 요청된다. 이 방향에서의 연구성과는 지금 *혼다 미노부(本田實信)에 의한 노작 이외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는 아직 그다지 출현하고 있지 않지만, 가까운 장래 속출하는 것은 아닐까?

2. 硏究者와 硏究分野

대략 50세대 이하의 연구자와 그 분야를 열거하여 소개한다. 우선 한문사료 및 몽고어사료 등 동방문헌을 다루는 연구자부터

나가세 마모루(長瀨守) 元代水利史
마끼노 슈우지(牧野修二) 元代官制, 政治史
大藪正哉 元代宗敎社會史
후지시마 타케끼(藤島健樹) 元代政治史, 佛敎史
요시다 준이찌(吉田順一) 元朝秘史, 몽골史
우에마쯔 타다시(植松正) 元代法制史, 江南社會史, 元典章
오오지마 타쯔꼬(大島立子) 元代漢族史
하라야마原山煌 元朝秘史, 몽골史, 書誌學
오오타太田彌一郞 金元時代政治史
하시모토橋本勝 元朝秘史, 몽골歷史言語學
모리타 켄지(森田憲司) 宋元時代史 社會史, 文獻學, 石刻學
키타무로北村高 元代佛敎史, 위구르社會史
이케우찌池內功 金元時代史 漢人軍閥史
가타야마片山共夫 怯薛制, 漢族知識人問題
이토井戶公一 侍衛親軍問題
大葉昇一 探馬赤軍, 元代政治史
노구찌 슈이찌(野口周一) 元朝諸王制度
蓮見節 探馬赤軍 遊牧制度
노사와野澤佳美 金元時代軍閥, 元代佛敎史
이시하마 유미꼬(石濱裕見子) 元代티베트史
마쯔모토 히로가즈(松本浩一) 宋元時代民間信仰, 道敎史
토쿠나가 요우스케(德永洋介) 元代經濟史
金文京, 元曲, 宋金元時代文化社會
다까하시高橋文治 元曲, 金元時代文化社會

이밖에 宋代史의 미야자와 토모유끼(宮澤知之)가 元代의 商稅·財政·江南開發에 관한 논고를 발표하고, 또 明代史의 하마시마 아쯔도시(濱島敦俊)·檀上寬이 元末·明初의 江南社會에 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다음으로 어떠게든 페르시아어 문헌을 다루는 연구자를 열거한다.

勝藪猛 몽골時代史, 아시아史
에비자와 테쯔오(海老澤哲雄) 몽골時代史, 外交文書
시모志茂碩敏 프레그울루스史, 이란中世史
가토 가즈히데(加藤和秀) 13∼16世紀中央아시아史
家島彦一 아랍海洋交易史
키타가와 세이이찌(北川誠一) 프레그울루스史, 그루지아·아르메니아史
마쯔다 코우이찌(松田孝一) 몽골時代史, 元朝軍團史
이타니井谷鋼造 프레그울루스史, 룸 셀쥬그(R m Salj q)朝史
岩武昭男 몽골期이란史, 都市史
호리가와 마사아끼(堀江雅明) 東方諸王家史
키타오까村岡倫 몽골諸王抗爭史
우노宇野伸浩 몽골制度史
마쯔가와松川節 몽골史, 蒙古語碑刻·文書
堤一昭 元代政治史
나까무라中村淳 元代티베트史
스기야마 마사아끼(杉山正明) 몽골時代史

게다가 하네다羽田明·야마다 노부오(山田信夫)·護雅夫의 선도를 이어받아 근년 놀랄만하게 進展하고 있는 일본의 위구르文書 연구자에 관해서도 언급하면

마사히로(庄垣內正弘) 歷史言語學
오다小田壽典 위구르社會文化史
모리야스森安孝夫 中央아시아史
우나무라海村坦 위구르社會史
쿠다라 야스요시(百濟康義) 위구르佛典

만약 이것에 동시대의 마무룩(Mamluk)朝나 십자군, 혹은 지중해史 등의 연구자도 더한다면 훨씬 많은 수가 되는데 생략한다. 위에 적은 것을 通觀해 보면 근년은 元朝史·몽골時代史·이란地方史의 거의 세 다리로 서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금후도 당분간 이러한 형세가 계속될 것이다.

3. 展望과 課題

전후 이미 반세기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일본 몽골시대사연구도 “戰前의 有産”의 시대를 확실하게 지나, 연구의 주력은 점차 제2세대부터, 그들의 저작을 성장기에 읽은 연구자에로 진행한 제3세대로 이행하고 있다. 그 한편 일찍이 이 분야의 연구를 도입한 서구에서는 필자만의 인상인지 모르지만, 아시아에의 관심이 국민수준에서 급속히 엷어지고 지고 있는 것에 대응하여, 근년 이 분야를 지향하는 젊은층이 격감하고, 연구전체가 퇴조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구인으로써 아시아 諸語의 수득과 문헌조작의 習熟에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는 몽골시대사의 연구는 확실하게 분명히 어렵다.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배출된 유럽인 연구자는 실로 위대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그들의 先人이 너무 거대한 나머지 그것을 타고 넘으려고 하는 것에는 절망감이 먼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단지 미국에서 관심·주제는 個別分散 氣味는 있지만, 세대상의 단절은 없고 오히려 30·40세대에 훌륭한 연구자가 출현하고 있다. 그곳에서 조금 흥미로운 것은 이들 사람들의 연구성과에 일본인의 재래의 연구업적이 꽤 대폭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미국인 연구자에 일본어가 보급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연구의 방법은 어쨌든 발상·주장까지 모방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특히 우리들에는 서로 모순·어긋남·대립한 주장·결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複數의 일본의 연구가 같은 문맥에서 모순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우를 눈으로 볼 때 기묘한 기분이 엄습한다. 원래 이것은 자계??도 포함하여,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저술된 논고를 정확하게 읽고, 이해·흡수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中華人民共和國에서는 文化大革命의 종료후 ‘蒙元史’라고 하는 명칭으로 매우 活況을 맞이하였다. 주로 50세대의 실로 훌륭한 몇 사람의 지도자의 아래, 40세대이하의 연구자가 續出하고 있다. 특히 한문전적의 整理·校刊·各種 工具書의 제공은 놀랄만하다. 적지만 元朝史에 관해서는 세계의 同분야연구를 선도하는 것에 틀림없다.
이러한 정황을 살필 때 필자 나름대로의 조촐한 전망과 과제를 머리에 생각이 떠오른 그대로 순서없이 서술하겠다.
첫째 중국사로써 通有의 사건·측면을 지금까지 이상으로 순수하게 다시 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지금까지의 일본의 원조사연구는 역시 이질적인 사건·측면을 주로 추구하려한 경향이 강하다. 元朝史가 전후의 시대에도 계속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단절을 인정하려고 할 것인가 어느쪽이든 결국 사료에 있지만 아직 오로지 대부분의 사실을 쌓아 올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때 예견이나 선입견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싶다. 더욱이 중국사로써 추구하는 경우 金代史와 南宋史는 더욱 적게 연구되어도 좋다는 것은 아닐 것인가? 원대전반기의 여러 면에는 금대에 이미 胚胎·成立하고 있는 사건이 투영하고 있는 점이 많다. 금대사는 그것만으로 연구하려고 하면 자료부족 등 때문에 어려운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원조사료를 발췌하여 그것에서 금대의 사료나 문제에 거슬러 올라가면, 전망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남송에 관해서는 그 최후의 70년간을 몽골시대의 테두리의 속에 두고 취급하는 연구는 거의 없다. 게다가 몽골에 접수된 후의 舊南宋領에 관해서는 근년 간신히 연구가 시도되었을 정도이다. 특히 遼宋對立에서는 300년, 金·南宋의 대립에서는 160년의 南北朝狀態가 소멸한 것이다. 이 대립은 그렇게 간단히 소멸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인가? 중국사를 통해 큰 주제의 하나일 것이다. 舊南宋의 士人과 그 문화·사회·경제의 문제는 元代中期以後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몽골기의 유라시아세계 전체를 살피는 위에도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두 번째는 이것은 몽골시대의 동서에 미치는 것인데, 이 시대의 여러 현상을 분석할 때, 종래 우리들은 조금뿐인 인종·민족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하게 너무 의식한 것은 아닐까? 인종·민족·종교·언어 등의 분류를 19∼20세기에서의 방법으로 엄밀하게 지나치게 고찰하면 모처럼 사료의 속에서 찾아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기성의 민족대치의 도식의 속에서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몽골시대는 우리들이 보통 서술용어로서 사용하고 있는 민족·종교·국가 등의 개념이 전근대의 유라시아에서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를 살피는 절호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漢籍에서는 元刊本 페르시아語文獻 등에서는 原寫本 등 가능하면 원래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문헌을 확인하고 이용하는 것이 금후의 점점 한창이 되는 것은 아닐까? 몽골시대는 실로 흥미로운 것으로 東西洋文獻群 공히 完全同時代의 간본·사본의 모습으로 상당수의 典籍史料가 다루고 있다할 수 있다. 그 위에 문서·비각 등의 原物도 꽤 남아 있다. 미발견·미개발의 문헌도 필시 아직 있을 것이다. 이미 알려진 문헌에 관해서도 실은 의외로 철저한 이용에는 거리가 먼것도 많다. 질량·방법 공히 사료상의 끝까지 봄은 시기상조라고 하여 지장이 없다. 그 한편으로 전제로써는 정치력에 의한 국가편찬물에서 문서·비각까지 公私 아울러 각종의 수준의 사료가 일단 갖추어진 정황이기도 하다. 사료의 량에서 보아도 동서사료 공히, 반드시 많이는 아니지만, 그러나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극히 당연한 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문헌 그것의 연구에 강하게 달라붙어 계속하여 그 성과를 공통의 지식으로 되어가는 것이 한층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네 번째로 페르시아사료를 중심으로 하는 非漢文文獻의 譯注가 지금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행해질 것이다. 아랍사료 혹은 베네치아(Venezia)사료나 고대 러시아사료 등도 몽골시대사의 전개속에서 다시 다루어져 갈지도 모른다. 나까 미찌오(那珂通世)의 {元朝秘史}의 譯注가 그후의 연구를 크게 촉진한 것같이 철저음미에 기초한 기본사료의 飜譯·注記의 제공은 역시 역사연구의 중핵이고, 급무이기도 하다. 필자도 포함하여 꼭 {集史}를 비롯한 여러 책을 일본어로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그것이 성취한때 비로소 동서의 역사현상을 똑바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우리들의 지식은 러시아방면에 있어서 어떻든 빈약하다. 조치 울루스( o i-ulus)는 몽골서반의 거대세력이고, 그 이해는 몽골시대사 전체속에서 빠뜨릴 수 없다. 몽골-모스코바 러시아-소련(-러시아)라고 하는 縱筋의 흐름은 유라시아世界史上의 큰 주제일 것이다. 또 몽골발원의 카자흐(Kazakh)·우즈벡(Uzbek)·볼가 타타르(Volga-Tatars)·오세티아(Ossetia)·아제르바이젠(Azerbaidzhan) 등의 역사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현재 크림 타타르(Krym-Tatars)가 故土의 크리미아반도에 속속 귀환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 통합의 상징은 프랑스혁명의 직전무렵까지 존속한 몽골의 계보를 이은 국가 ‘크림 칸(Kyrm Khan)國’이다.
주지하는 것같이 러시아·소련의 동양학은 몽골시대에 관해서도 많은 성과를 축적해가고 있다. 그렇지만 더욱이 史料·文獻·遺物·遺跡·硏究의 전모는 덧붙일 필요가 없다.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이 벽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의 시야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몽골영역에 미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는 몽골시대사는 설령 한 문헌만을 다루어서는 언어·지식의 위에서 어떻게든 개인의 노력으로써는 뒤집기 어려운 것이 있다. 각각의 연구자가 전문으로 하는 분야·주제를 깊게, 세밀하게 하기 위해서도 한편으로는 넓은 정보·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 때문에 다른 종류의 各言語文獻이나 개별의 분야·주제를 다루는 전문연구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會讀 내지는 討論을 행하는 공동조직이 의미를 가진다. 현재 그러한 회합·집합이 몇 개인가 이루어져, 그 성과가 천천히 이지만 계속 나오고 있다. 금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할 것이다.

이상 극히 혼잡하게 일본에 있어서 몽골시대사연구의 과거와 현재를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연구업적의 상술은 번거로워서 피하였다. 大略을 추구한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원래부터 눈에 미치지 않은 것도 많고, 또 말을 다하지 못한 것도 많다. 조금이라도 본고에서 유익한 점을 찾을 수 있다면 기쁘겠다.
몽골時代史硏究의 現狀과 課題

스기야마 마사아끼(杉山正明)
梁寧佑.任大熙 옮김

머리말

‘몽골시대’라고 하는 포착방식, 사고방식 그리고 命名은 최근의 것이다. 13·14세기 몽골이 세계와 시대의 중심에 있던 거의 150년 정도의 것을 말한다. 유라시아의 동서에 걸쳐 역사현상을 상세하게 취하려는 장대한 발상과 장한 의기를 나타낸다.
이 명칭과 사고방식은 혼다 미노부(本田實信) {몽골時代史硏究}(東大出版會, 1991)에서 비로소 명시되었다. 혼다는 이 시대에 관한 2대사료군이라고 할 수 있는 페르시아語 史料와 漢文史料를 원전으로 기초를 둔 근본적으로 본격 이용한 일본 최초의, 그리고 필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세계최초의 연구자이다. 모든 것이 세계의 연구자에게 써는 필독의 논문밖에 없기 때문에 완성된 혼다의 大著가 간행된 이후 ‘몽골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종종 눈을 끌고 있다.
그런데 그 ‘몽골시대’를 제목으로 한 본고는 일본에서 중국사연구의 과거·현재·장래를 멀고 넓게 내다 보려고 하는 기획에서는 조금 색다른 입장에 있다. 그것은 원래 13·14세기에 관해서는 ‘중국’이라는 테두리에서는 적합하게 끊을 수 없는 시대상황·역사전개·연구상황이기 때문이다.
좀더 평이하게 말한다면, 이 시대에 있어서는 중국은 전체의 속의 일부분이고 유라시아와 중국이 밀접하여 불가분의 형태로 역사도, 연구도 움직여 왔다고하는 것이다. ‘中國’, ‘宋元時代’라고 하는 본서를 꿰뚫는 두가지의 주요어는 부등호로 맺어진 관계에 있다고 하여 좋을지 모르겠다.
따라서 다루는 內容·領域·分野·視點·史料·話題는 중국을 기점에서 표현하면, 때로는 이른바 ‘중국본토(China proper)’ 그것에 관계되고, 때로는 널리 現中國領域에 상당하는 것이고 게다가 때로는 그것을 훨씬 넘은 지역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었고, ‘중국’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것이나 ‘중국사’, ‘宋元時代史’에도 가지가지로 關係·程度에서 관련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미리 이야기 해 두고싶다. 그것은 필자는 이 테마에 관련해 극히 최근에 [日本에 있어서 몽골時代史硏究]({中國史學}1, 1991년)와 [遼金元](中華書局 {日本學者硏究中國史論著 選譯}제5권 五代宋元의 前言)을 정리했다. 그것들과 가능하면 내용상의 중복을 피하고 싶지만 그러나 어떻게도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 점을 양해를 구하고 싶다. 그렇지만 가능한한 설령 前出의 두 논고를 논경우에도 그것 나름대로 다른 것으로써 좋겠다.
더욱이 본고에서는 ‘基本問題’에 초점을 묶어 大狀況을 서술하고, 하나하나의 論著·硏究의 세부의 詳述이나 文獻目錄 정리작업은 가능한한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러한 것은 몇 개나 있고 또 연구의 큰 테두리에 관한 것을 서술하는 편이, 이 기획의 취지에도, 本稿에 주어진 주제에도 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Ⅰ. 現狀의 속에서

(1) 몽골時代史硏究에 있어서 ‘세로’와 ‘가로’
크게 보아 13·14세기의 몽골시대의 연구에는 두가지의 입장이 있다. ‘세로’와 ‘가로’의 두가지이다. ‘세로’라는 것은 中國·中央아시아·東南아시아·인도·이란·中東·西北유라시아·유럽 등 ‘文明圈’마다 시간을 종단해서 다루는 입장이다. 지역을 결정하여 시대를 꿰뚫는 ‘역사의 줄기’를 물으려고하는 입장과 바꾸어 말하더라도 좋다. 원대중국의 역사연구는 그것의 하나가 된다. 물론 극히 중요한 하나이다.
한편 ‘가로’라는 것은 역사의 동시성을 중시하여 지역의 테두리를 넘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다루는 입장이다. ‘몽골시대’라고 하는 세계사상 극히 특별한 시대를 살피려는고 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좋다. 인류사상 최대의 超廣域國家를 이룬 몽골과 그 지배를 熟慮하는 연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몽골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세계전체를 조망하여 하나의 정리된 世界像을 모색하려고 한다.
이 두가지의 입장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다. 그러나 원래 無緣하지는 않다. 단지 연구의 단계에서 말하면 당면의 것은, 따로따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양방이 교대로 연락을 취하면서 진행하는 길이다.
‘가로’의 입장에서 보면 몽골시대의 각 지역사는 어떤 지역에 관해서도 거의 한결같이 허술하다고로 해도 좋다. 혹은 연구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종래는 오해와 편견이 걸핏하면 우세하다고 마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술하는 것처럼 원대중국에 밑둥을 자리잡은 역사연구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다. 종합해서 중국사의 다른 시대에 비하면 質量 공히 저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금후 원대중국사의 연구는 전근대의 중국사연구의 속에서 크게 남겨진 ‘미개척지’로써 일본에 제한하지 않고 많은 나라들의 중국사연구자로써 매력에서 풍부한 분야가 될 것이다. 이 분야를 염두에 둔 사람은 필시 다른 時代史보다도 성과를 올리기 쉬운 客觀情勢에 있다.
한편 ‘세로’의 입장의 연구는 솔직하게 극히 곤란한 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20 數 個 國語에 이르는 원전을 과연 어느정도 스스로 다루어 낼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잉태한다. 그렇기는 커녕 이 시대의 2대 사료군이라고 하는 한문문헌과 페르시아어문헌의 양방에서 환하게 아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중국문명권과 이란문명권과는 각각 유라시아, 게다가는 이 지표의 모두를 대표하는 역사의 두터움과 역사기술의 전통을 가진 2대문명권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元代漢文文獻을 다루려고하면 古典漢文(이른바 雅文)·吏讀(事務記錄·各種文書 등에 사용되는 문체)·白話(이른바 口語文)·몽골語直譯體白話風漢文 적어도 4종은 해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한쪽은 몽골시대에서 하나의 정점에 달한 페르시아어문헌 특히 연대기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기술는 페르시아어라고하기는 하나 방대한 몽골어·투르크어의 어휘를 포괄하는(그것들 자체가 대체 역사·언어연구를 필요로하는 용어·개념이다), 나아가서는 그밖의 언어지식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근세페르시아어의 문헌독해에 아라비아어의 최저한의 소양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구자라고 하더라도 결국 일개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제한된 생애와 제한된 능력의 속에서 역사문현이나 유물과 격투하는 것이다. 事態는 당연히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가로’의 연구에는 티벳트어·산스크리트·라틴어의 지식도 불가결하다. 원래 제2차문헌인 기존의 著作·論文·報告 등을 독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근대어는 열손가락을 든다. 라고 하면 언어문헌학상에서 필요한 능력의 획득에 인생의 대부분을 지불해 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인간의 언제나처럼 일단 획득된 능력이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하는 보증은 완전히 없다. 역사연구자로써의 생애의 대부분이 진정한 연구를 위한 준비에 흘러가버린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진실로 ‘가시밭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렇더라도 ‘세로’, ‘가로’ 어느쪽이든 간에 몽골時代史의 연구는 다른 어느 역사분야에도 한층더 할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 특히 인류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의미있는 크기에 의한 것이다.

(2) 元代史硏究에 있어서 史料狀況의 幸運
이하 화제를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돌리려고한다. 그 결과, 설명이나 서술이 보다 功利主義·實利主義에 기울지도 모르지만 그 점 미리 양해를 바란다.
전에 서술한 [몽골時代史의 가치]에는 또 한가지 연구의 현실면에 있어서도 행운의 객관정세에 운이 있는 것을 덧붙혀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하나는 원래 사료의 적당한 양과 다양함이라고 하는 좋은 조건이 있은 위에, 근년 급속히 신출사료가 나타나, 그리고 이미 알려진 문헌에 관해서도 근본상태의 간본·사본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성립해가고 있는 것이다. 연구상의 물리조건이 종래에 비교하여 格段으로 좋아졌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또 하나는 元代史硏究에 관해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여전히 연구축적의 빈곤과 편향이 널리 몽골時代史를 덮고 있는 것이다. 연구조건의 개선과 연구 자체의 不足·不備는 현재와 장래의 연구자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이 행운의 정세는 ‘세로’, ‘가로’ 어느쪽으로도 인정된다. 우선 ‘세로’의 입장에 관해 서술하고 싶다. 북아시아·중앙아시아·이란지역의 각각에 관해서도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독자의 대부분은 중국방면에 관심을 가진 분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여 화제를 중국지역에 제한하고 싶다.
극히 근년 중국대륙에 있어서 개방정책이나 그 밖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원대중국에 관한 여러 사료는 質量 공히 괄목할만하게 좋아졌다. 실은 이것이 元代史硏究에 있어서 최대의 화제라고 해도 좋다.
元代中國에 관한 사료는 매우 많다. 한문문헌만으로도 정사인 {元史}이하 {元典章}, {通制條格}이라는 政書, 상당수의 문집들의 典籍 이외에 후술할 각종의 文書·寫本類, 여러가지 內容·水準·傳存狀況의 石刻資料, 그리고 明淸·民國期의 地方志 등에 移錄된 각종의 문장이 있다. 五代·唐 이전처럼 적은 것은 아니다. 宋代보다도 아마 많을 것이다. 시대의 長短을 계산한다면 사료의 밀도차는 歷然해진다. 그러나 명대후반 이후처럼 너무 많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한사람의 생애동안 모두를 읽고, 모든 것을 취하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等身大의 사료량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대체로 겨우 한번 다루어진 정도이거나, 혹은 거의 손대지 않은 것도 있다. 때로는 元代漢籍은 ‘너무 다루어졌다’라고 극론 경향도 일부에 있다. 더구나 일찍이 ‘모든 元代漢籍을 읽었다’고 豪言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은 元代漢籍 전체의 물량의 ‘확인’마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다 읽었다’고 자찬하는 것은 가상하지만, 예를 들어 많은 언어에서 유래하는 각종의 어구가 아로새겨져 있는 {元史}의 本紀에 관해서도 마저, 극명하게 모든 것을 파악한 역사학상·언어문헌학상의 능력을 한사람으로써 겸비한 인간이 원대사연구에 아직 출현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물며 원대문집을 거의 모두 볼 수 있게 된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다. 덧붙여 거의가 신출사료에 가까운 文書·寫本·碑刻資料에 관해서는 과연 정확히 어느 정도의 총량이 있는 것일까, 이럭저럭 매우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직 정확한 수자마저도 확인되어 있지 않다. 원대한적의 모두를 ‘통달’한 사람나더 있는 것도 아닌 現狀에서, 이러한 大言壯語를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어느종류의 굳은 결심에 더해 일부의 연구자의 허세와 허무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刊本의 수준마저 포함하여 元代漢籍이 어쨌든 대부분 대충 갖추어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 되어서 부터이다. 역사의 분야에 제한하지 않고 착실한 동시에 견실한 문헌연구의 위에 선 元代學術硏究는 아직아직 길에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의미로는 분명히 급히 우선은 모든 것을 ‘훑어 볼’가치는 있음에 틀림없다.
덧붙여 후술하는 것처럼 宋遼金時代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서·사본·비각의 다양함은 보다 다채로운 각도에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純中國史硏究者]에게는 종종 묵살되었지만, 몽골어·위글어·티벳트어·서하어(나아가서는 실은 페르시아어·아라비아어·라틴어·중세프랑스어) 등의 諸語文獻도 실은 보통으로 예상되는 이상으로 한문문헌과 밀접한 관계속에 이용·파악되는 경우도 꽤 있다. 이러한 가지가지의 좋은 조건의 아래, 오히려 사료의 쪽이 겸허하고 정직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3) 宋元硏究의 偏向과 問題點
그런데 지금까지 일본에 있어서 元代史硏究는 특수한 경위와 상황속에서 빠져들어 왔다. 遼金元이라고 하는 ‘北’으로부터의 발상과 宋元이라고 하는 ‘中原’으로부터의 시각이 병존했다. 그 때문에 원래 하나임에 틀림없는 당시의 역사가 두 개로 갈려진듯한 모습으로 연구되어 왔다. 원대사연구의 日淺함과 편향의 한 원인에는 이른바 구조상의 문제도 있다.
본서가 표제에 내놓은 ‘宋元時代史’라고 하는 생각은 그 한 입장을 보다 강하게 받는다. 일본의 연구에 있어서 보통 ‘중국’이라고 하면 이른바 [중국본토]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용을 [중국본토]에 한정해서 보면, 宋代史硏究와 元代史硏究의 段差는 누구의 눈에도 분명할 것이다. 감히 대담하게 말하면, 本書에 있어서 원대사연구에 할당된 비중이, 과연 어느정도의 것이 될 것인가? 그것이야 말로 일본에 있어서 ‘宋元時代史의 基本問題’의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遼金元이라고 하거나, 宋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편의상의 불완전한 구분짓기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이러한 분류법을 과도하게 필연시하거나 하면 역사연구상 뜻하지 않게 함정에 빠지게 된다.
遼金元과 宋元이라는 두 개의 입장의 병존·상극에서 생긴 몇가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전고 [遼金元·前言]에서 언급했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3가지 점에 관해서만 서술하는 것으로 그치고 싶다.
우선 첫째로 역사현상 그것을 조망하면, 송대에서 원대에 中華世界는 內外兩面으로 그 史上을 통해 屈指의 큰 변화를 이루고 있다. 외면에서는 ‘작은 중국’으로부터 ‘큰 중국’으로의 변신이다. 물론 무엇을 가지고 ‘中華’, ‘中國’이라고 하는가 라는 근본에 있어서 議論은 있다. 그것을 의논하기 시작하면 논점은 복잡하게 되기에 극히 단순한 歷史事實로써 원대 이후 ‘中華’, ‘中國’의 테두리의 거대화는 歷然하다.
‘중국’을 둘러싼 공간상·개념상의 테두리는 몽골시대에 一擧에 확대되어, 그후 그 사실과 기억이 시스템화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이 극히 당연한 것은 보다 강하게 의식되어 좋다. 이른바 ‘중국본토’의 영유도 충분히 없었던 송대와, 북쪽으로부터 위협이 없어진 ‘중국본토’와 그 주변만을 가지고서도 三百數十年만에 국경의 벽이 없는 상황이 되었던 원대와는 주어진 역사환경이 根底에서부터 다르다. 이 점에 주의한 연구나 발상이 좀더 필요할 것이다.
內側에서의 변신은 송대부터 원대를 통한 시대속에서 ‘중국’ 그 자체의 중심이 그때까지의 華北중심의 상황에서 江南으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南宋의 성립과 그 전후의 華北人口의 南方移動을 계기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남에 있어서 개발과 漢化가 진행하기 시작하고, 江南여러 지역의 人口·社會·經濟·文化의 비중은 증대했다. 이 남북의 逆轉現狀은 원대에 그대로 옮겨져(라고 하기보다도 엄밀히는 원대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해) 명대에 있어서 상황에 직접으로 연결된다. 이것또한 현재에 이어지는 중국사상의 큰 현상이라고 해도 좋다.
明代中國과의 꿰뚫어보기 위해서도 南宋·元代를 통한 江南硏究가 활발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규모로 조망하면 남송의 유산을 흡수한 몽골의 손에 의해 강남의 세계에서 첫째로 부유하게 발전의 가능성에 가득찬 ‘生産社會’(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의 다른 지역과의 비교의 위에서)로써 陸海 兩方을 통한 모습으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몽골시대라고 하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전체를 同時性의 尺度로 잴 수 있는 다시없는 그때, 강남사회의 우월은 歷然했다. 또, 그때를 종종 종래의 중국사연구자가 한 것처럼 추측이나 願望을 담는 단어가 아니라, 확실한 뒷받침을 수반한 證明·明言할 수 있는 時代環境·史料狀況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종래의 일본의 ‘宋元時代史’의 연구에는 몇 가지의 큰 空白·缺陷이 있다. 가장 알기쉬운 것은 金朝治下의 華北이다. 특별한 연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어떻게든 연구의 시작마저 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華北이라는 것에서는 ‘夷狄’이나 ‘塞外’라고 하는 기묘한 ‘分類’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竺沙雅章이 [征服王朝의 時代](新書東洋史3, 講談社現代新書, 1977年)에서 明言한 것처럼 宋代以後의 ‘中國’의 역사는 北宋-金-元의 北流와 北宋-南宋-元의 두 큰 흐름이 있었다. 적어도 북류의 연구에는 중대한 공백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결함은 南流의 쪽에도 있다. 솔직히 말해 일본에서의 남송시대의 연구는 몹시 일천하다. 더구나 그렇지 않아도 일천한 元代의 ‘中國’史硏究의 가운데에서 江南에 관해서는 더욱 극단적으로 일천하다. 감히 거듭하여 솔직히 말하면 미미하게 있는 기존의 원대강남연구도 바야흐로 급속하게 좋아지는 사료상황과 몽골과 그 지배에 관한 역사상황의 이해와 근본으로부터의 개선이라는 2가지 점의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면 몹시 지나치게 유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구사로써의 사정은 어쨌든 현시점에 있어서 ‘생존한 연구’로써는 극히 활발한 중국의 원대강남연구와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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