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칠판’(★★★★)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지대, 황폐해진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모래언덕과 바위산 사이로 쿠르드 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어디에서 국경수비대의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 아이들은 군인들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나들며 밀수품을 운반한다. 노인들은 아들의 등에, 며느리의 어깨에 기댄 채 무겁고 팍팍한 발길을 옮긴다.
목숨을 건 행렬 중 학생들을 찾아나선 두 명의 총각 교사가 있다. 엿장수가 좌판을 목에 걸고 가위질을 하며 엿을 팔 듯, 선생님은 칠판을 등에 업고 글을 팔러다닌다. “구구단 배우세요! 글 가르쳐 드려요!”
갈 길이 바쁜 아이들의 팔을 붙잡고 굳이 앉혀서 물어본다. “글 읽을 줄 아니?” “아뇨.” “잘됐구나, 글 가르쳐줄 테니 배워라.” “싫어요.” 한 명의 교사는 아이들의 밀수품 운반 행렬에 끼어들고, 또 한 명의 교사는 고향을 찾아가는 한 무리의 일행 속에 섞인다. 영락없이 주책 맞고 엉거주춤한 아저씨인 두 교사의 품새는 웃기지만, 눈빛은 진지하기만 하다. 이 와중에 한 교사는 피난 행렬 중 만난 한 노인으로부터 죽기 전 소원이라며 과부인 딸과 결혼해달라는 말에 응락한다. 아내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지만 요령부득이다. 칠판은 지참금이 되기도 하고 부상당한 아이의 부목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란의 천재감독으로 꼽히는 인물이자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딸이기도 한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영화 ‘칠판’은 각색하지 않은 진실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했다.
한 명의 여배우를 제외하고는 출연자 모두가 일반인들, 비전문배우들인 것이다. 칠판을 지고 다니는 교사 역의 바흐만 고바디는 이 작품를 인연으로 영화에 본격 입문,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감독으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칠판’은 단순함, 자연스러움, 천진스러움이 감싸고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팍팍하고 부조리하며 약한 자에게는 늘 악랄한 현실을 바로 보게 한다. 마지막에 울리는 국경수비대의 총성은 피곤한 삶을 일찍부터 살아가야 했던 한 아이의 가슴과 함께, 관객의 심장을 관통한다. 사미라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시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더 정치적이고, 울림이 큰 영화다. 14일 밤 12시30분 KBS1 방영.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
출처 : Fusion Power – 대중경제문화지 ‘헤럴드경제’